겹침의 아름다움
“그림자가 겹치면 더 어두워질까요?” 시한부 판정을 받은 한 사내가 주인공 히로야마에게 던진 질문이다. 히로야마는 대답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된다고. 매일 집 앞에서 한 할머니의 비 쓰는 소리에 잠에서 깨고, 양치를 하고, 화분에 물을 주고, 파란색 작업복을 입고, 똑같은 자판기 캔 커피를 먹으며 출근하는 주인공 히로야마. 매일 챙겨가야 할 소지품들을 순서대로 놓아둘 만큼 질서와 안정을 추구하는 주인공마저 변화는 당연한 거라 말한다.
빔 벤더스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2024)는 시종일관 그런 겹침을 찬란하다고 말한다. 빛의 각도, 나뭇잎 모양, 그리고 바람의 세기. 세 변수가 만든 그림자는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처럼. 주인공 히로야마의 반복되는 삶 속에서도 우연한 ‘겹침'이 변주를 만든다. 화장실 청소부인 히로야마는 매일 다른 이들을 마주하며 오늘이 또 어제와 다른 하루임을 느낀다.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 밤샘 회식으로 아직 술이 덜 깬 직장인. 그는 그때 말없이 옅은 미소를 띤다. 누군가 화장실에 남기고 간 빙고 게임 종이에 X를 그리며 게임을 이어 나가는 그의 표정엔 하루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 마저 묻어난다. 그런 변주가 단지 기쁨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청소부 후배 다카시가 갑자기 일을 관두자 늘어난 일에 그는 짜증을 내기도 하고, 연락을 끊고 살던 동생과의 만남에 오열하기도 한다. 마지막에 차를 몰며 웃는지 우는지도 모르는 그의 표정에서 기쁨 그리고 슬픔 만감이 교차한다. 경계를 넘나드는 겹침이 찬란한 이유는 그냥 그 순간에만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각자 세계에 살아간다. 그러면서 우연히 포개어지기도 한다. 나의 세계를 알아봐 준 누군가에 강한 친밀감을 느끼기도 한다. 50대 남성인 히로야마와 20대 여성인 다카시 여자 친구. 전혀 겹칠 게 없던 두 인물이 ‘카세트 테이프'의 감성과 취향에 공감할 때, 히로야마와 10대 조카 니코가 각각 필름 카메라와 아이폰으로 일렁이는 그림자를 함께 포착할 때. 시대와 성별을 뛰어넘어 포개지는 그 순간을 기적이라 말하는 건 과한 얘길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마지막으로 한 문구가 나타난다. '코모레비: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을 뜻하는 일본어로 코모레비는 그 순간에만 존재합니다'
취향의 파편화. 초개인화 시대 겹침의 영역은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다. 단적으로 O,A,B,AB 4분의 1로 연결되던 우리는 이제는 MBTI, 16분의 1 더 적은 확률로 겹치게 됐다. 각자 고유한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우리가 연결되는 순간은 그래서 더 소중하다. 포기와 배려라는 위계적 층위가 아닌 수평적으로 겹치는 우리의 순간. 시선의 각도, 우리의 모양, 공감의 세기가 만들어내는 순간의 찬란함.